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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아홉 개의 출발점 ③ 가치와 시간의 자리

지난 이야기 — 힘·사람·앎까지 다섯 개를 깔았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전부 '가능한가'의 문제였고, '옳은가'는 안 나왔습니다.

이번 질문 — 어떻게 나누는 게 옳고, 법과 현실의 시차는 어떻게 다루는가.

1부 · 3/4 · 약 3분 · 다음 04


가치의 자리

A6 「능력에 비례해야」 — 부담은 능력에 비례해야 합니다

이건 효율의 문제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입니다. 앞의 다섯 개에서 따라 나오지 않습니다. 사회가 그렇게 하기로 한 겁니다.

응능부담(應能負擔) — 능력에 응해서 부담한다는 뜻입니다. "번 만큼 낸다"를 네 글자로 줄인 겁니다.

그런데 이게 없으면 세법의 상당 부분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 매출이 아니라 이익을 과세 대상으로 삼는 이유 — 관찰만 따지면 매출이 훨씬 쌉니다
  • 소득이 클수록 세율이 올라가는 이유 — 효율만 따지면 단일 세율이 낫습니다
  • 부양가족·의료비를 빼주는 이유 — 계산이 복잡해지기만 합니다
  • 작은 사업자를 봐주는 이유 — 일부는 A5「알아내는 데 돈 든다」지만 일부는 A6「능력에 비례해야」입니다

A5「알아내는 데 돈 든다」와 A6「능력에 비례해야」는 자주 충돌합니다.

능력을 정확하게 재려면(A6「능력에 비례해야」) 비용이 듭니다(A5「알아내는 데 돈 든다」). 세법을 읽다가 "왜 이렇게 어중간하지?" 싶은 규정을 만나면 대개 이 둘이 타협한 자리입니다. 간이과세, 추계, 표준공제가 전부 그렇습니다.


시간의 자리

A7 「법이 현실보다 늦다」 — 법은 미리 쓰이고, 현실은 나중에 옵니다

A2「법에 미리 있어야」가 "법에 미리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입법자는 오늘 법을 쓰고, 그 법이 적용될 거래는 내일 만들어집니다. 법을 쓸 때 존재하지 않던 거래 형태가 계속 생깁니다.

A3「덜 내려 한다」가 있으니 사람들은 법이 예상 못 한 형태를 적극적으로 찾아냅니다. 법에 안 걸리는 방식으로 같은 결과를 만드는 거죠. 위법이 아닙니다. 법이 못 따라간 겁니다.

여기서 세법 특유의 긴장이 생깁니다.

A2  법에 없으면 걷을 수 없다

A7  형식만 다르고 실질이 같은데 못 걷는 게 옳은가

10부「법의 틈」 전체가 이 긴장의 전개입니다. 그리고 이 긴장은 해소되지 않습니다. 한쪽을 완전히 이기게 하면 다른 쪽이 무너지니까요.

  • A2「법에 미리 있어야」가 완승하면 → 우회가 항상 이깁니다
  • A7「법이 현실보다 늦다」가 완승하면 → 과세관청이 아무 거래나 다시 계산할 수 있게 되어 예측이 불가능해집니다

A8 「언젠가 끝나야」 — 관계는 언젠가 끝나야 합니다

30년 전 거래 때문에 오늘 세금을 물린다면 아무도 사업을 못 합니다. 장부를 평생 보관해야 하고, 모든 거래가 영원히 미확정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 법이 손을 뗍니다. 이게 제척기간·소멸시효의 뿌리입니다(10부「법의 틈」에서 자세히 봅니다).

이건 A5(비용)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순전히 비용만 따지면 "회수액이 추적 비용보다 크면 30년 뒤에도 추징"이 최적입니다. 그런데 실제 제도는 그렇지 않죠. 법적 안정성이라는 별개의 요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A8「언젠가 끝나야」는 A3「덜 내려 한다」와 타협합니다. 숨긴 사람에게도 똑같이 짧은 기간을 주면 숨기고 버티는 게 최선의 전략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부정하게 숨긴 경우는 기간이 길어집니다.

안정을 주되, 비난받을 행동을 한 사람에게는 덜 준다. 이 원칙이 세법 곳곳에 나옵니다.


여기까지

  • A6「능력에 비례해야」 — 효율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라 앞의 다섯에서 따라 나오지 않습니다. A5와 자주 충돌합니다
  • A7「법이 현실보다 늦다」 — 법은 미리 쓰이고 거래는 나중에 생깁니다. A2와의 긴장이 10부 전체입니다
  • A8「언젠가 끝나야」 — 비용이 아니라 법적 안정성에서 나옵니다. 다만 숨긴 사람에게는 덜 줍니다

▶ 다음04. 아홉 개의 출발점 ④ 공간, 그리고 짝짓기

나라가 여럿이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그리고 아홉 개를 어떻게 쓰는가.

원리 축의 글입니다. 값(세율·기한·금액)은 반드시 원문 법령으로 확인하세요.